전체 글373 모순적인 평화. 별의 아이라고 불리던 이, 이제는 비셰라고 불리게 된 아이는 굳게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강렬하게 내리쬐던 빛이 없으니 눈을 뜨기가 한결 편안했다. 비셰는 작은 손을 뻗는다. 흉터와 상처로 뒤덮여있던 손이 거의 다 나았지만 어떤 상처는 계속 낫지 않았다. 자그마한 움직임에 비셰를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것, 재앙신이라 불리는 현자가 말을 건넨다. 잘 잤니?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에 비셰는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잘 잤어요. 키넬 님은요? 그는 곧 큰 손을 뻗어 작은 아이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잘 잤다고 화답하며 작은 이를 내려다본다. 섬뜩하게 갈라진 눈 안에는 온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과는 다른 존재였으나 오히려 다르기에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사람에 의해 상처받은 아이는 .. 2024. 9. 27. 끝나지 않는 악몽. 잠시 눈을 감기만 해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의 피와 비명소리, 끔찍한 나약함으로부터 기어올라오던 참극. 한껏 찌푸린 표정으로 감았던 눈을 뜬다. 한낮의 푸름을 닮았던 눈은 이제 탁한 하늘의 색을 띤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책상 위를 더듬는다. 작고 반짝이는 유리병을 집어들어 그대로 마개를 열어 무색무취의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는다. 도로 의자에 기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진다. 수면제에 취해 잠에 든다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깨어있을 때는 환상통이 함께하고 잠들어있을 때는 악몽이 함께하는 가련한 사람아. 그는 긴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쨍한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한껏 찌푸린 표정이 겨우 펴진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에 고개를 잠.. 2024. 9. 25. 나비 날개의 상인. 처음, 그 자가 있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면 기묘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맡는다는 말 대신 느낀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곳을 직접 방문한 자들은 모두 느낀다는 표현이 올바르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분명 향기롭고 조화로우나 이질적인 것은 어떠한 알 수 없는 기분을 불러온다. 길게 늘어진 찻잔과 수정구, 온갖 물건들, 제법 위험해 보이는 날붙이와 사탕과 같은 것들이 보인다. 제법 넓은 가게 안에는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넓은 공간 안은 물건으로 가득 차있었다.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곳이라니, 얼마나 형편 좋은 말인가? "또 오셨네요, A." "그래. 필요한 게 있어서."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랄 법도 했으나 이곳에 여러 번 방문해본 이는 놀라지 않는다. 처음에.. 2024. 9. 23. 가장 밝게 빛나는. 촛불은 꺼지기 전 가장 찬란하게 타오른다. 그렇게 긴 꼬리를 그리며 황홀하게 타오르는 유성우가 되어... 세실리아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들이킨 숨에서는 피냄새와 다른 비릿한 향이 느껴졌다. 조금은 미끌거리는 감각도 함께 느껴졌다. 그것이 피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다른 것에서 비롯된 감각인지 알 수 없었다. 흑색 밤하늘보다도 어두운 검은 눈이 뻑뻑한 듯 애써 깜빡인다. 죽은 사람이 몇인지, 산 사람이 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시체를 먹는 마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도망갔겠구나. 이곳에 남은 건 나와 몇명의 사람밖에 없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세실리아는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원하리라는 목적도 없다... 2024. 9. 22. 도망친 곳에 있던 것.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감각이 뚜렷하다. 토할 것만 같다. 얼마나 뛴 건지 모르겠다. 다만 뒤에서는 계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함소리. 비명소리. 장작 타는 소리. 프리지아는 아픈 숨을 내뱉는다.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져 보석이 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억세게 붙들고 있던 짧은 날붙이에서 새빨간 빛이 일렁거린다. 프리지아는 뛰던 것을 멈춘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아이가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줄 알았으나, 정확히 그 반대였다. 프리지아는 날붙이를 위로 치켜든다. 모든 것을 태울 듯 강렬한 불기둥이 솟아올라 추격해오는 사람들을 휘말리게 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주입당했던 것은 프리지아의 안에서 새로운 힘을 끌어내었다. 먹은 것도 없건만 속이 울렁거렸다. 불기둥이 천천히 사라.. 2024. 9. 22. 시들어버린. 그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옛적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서 눈앞에 서 있는 꼴이 심히 메스껍다. 무엇이, 어떻게 메스꺼운 줄도 모르고. 사실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슬픔의 한 종류였나?꽃의 이름을 가진 자는 그에게 늘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움이나 슬픔과 같은 선을 그리며 끝없이 추락하는 이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시커먼 하늘에 푸른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하염없는 공허함만을 불러오는 이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적절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후각이 없음을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고요의 화원을 만들어 그 속에서 스러진 자였다. 모든 감각이 울렁거릴 정도의 짙은 꽃향기로 가득했음이 분명하다. 절망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죽어버리.. 2024. 9. 19. 이전 1 ··· 4 5 6 7 8 9 10 ··· 6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