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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208

청색 시대와 청춘.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덧없는 청춘을 파랗게 불태워 세상을 지킨다면 비로소 안전해진다는 착각 말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늘 청춘이었고, 그들은 청춘을 파랗게 태워 청색 시대를 이룩해 냈다. 청춘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파란이 싫었다.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유지되는 세상이 싫었고, 강요받지 않고도 희생하는 청춘이 싫었다. 비극이다. 치유사인 사람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인생의 젊은 시절은 의미도 없이 조각나 피와 살점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영영 숨을 잃어버린 파란 사람들의 눈을 감겨주어야만 했다. 눈을 감을 힘도 없이 죽어버린 청춘이 불쌍해서. 나 대신 희생하고 만 청춘이 안쓰러워서.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은 가볍게 여기는 청춘에 못내 마음이 쓰여서.. 2024. 3. 24.
꽃바람의 화원. 꽃내음이 바람을 타고 넘실거리며 흘러간다. 하늘을 가득 채운 새파란이 흐른다. 그 사이에 수놓인 몽글몽글한 구름은 쉴새없이 흔들린다. 로즈는 가느다란 손을 가만히 뻗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구름을 바라본다. 붉고 하얀 시선은 하늘을 눈 안에 가득 담는다. 고운 머리카락 안에 푸름을 가득 담고 있던 이였지만 여전히 넓게 퍼져있는 푸름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것은 자유로웠고, 부드러웠으며, 언젠가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딱 알맞았으니까. 로즈는 하늘을 보며 덧없는 추억을 그린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미소를 떠올린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 가족의 얼굴을 떠올린다. 로즈는 늘 하늘에서 가족들의 미소를 찾았고, 그것을 끈질기게도 사랑했다. 곧 주변에 느껴지는 감각에 시선을 돌린다. 눈 안에는 사랑하.. 2024. 3. 13.
독 머금은 음악. 격정적인 선율, 빠른 흐름, 난잡할지도 모를 음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곳의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체스를 두고 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한 사람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 것이냐고. 어차피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가 확실해요. 평온하게 찻잔을 입에 갖다 대는 그를 보는 사람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굴린다. 곧 투박한 나무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거의 기어 오듯이 들어온다. 옅은 피냄새가 풍긴다. 그는 기어들어오는 사람을 보곤 부드럽게 웃었다. "결과를 말해 봐요." "... 월광, 당신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모든 건 당신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지분 싸움을 하던 사람은 모두 죽었고, 그것은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으며 그로 인해 모든 비리를 잡아내면.. 2024. 3. 12.
종이학 접기. 그녀는 마음속으로 종이학을 접는다. 아주 나쁜 일이나 슬픈 마음이 들 때면 하나씩 접었다. 종이학을 마음속으로 접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남편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남자. 서로의 짝은 오롯이 서로 뿐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학예회에 설 때면 늘 파트너로 서로를 골랐고, 그녀의 어머니가 부고를 당했을 때 옆에 온종일 같이 있어주던 것도 하나뿐인 짝이었다. 둘은 그때 약속했다. 슬플 때마다 마음속에 종이학을 접어보자고. 아무리 슬퍼도 죽지 말자고. 그렇게 수많은 종이학이 쌓인다면, 우리를 죽이지 못한 아픔은 언젠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둘은 남몰래 약속했다. 둘은 어느덧 성인이 되었다. 둘 다 특수부대에 들어갔다. 의금부에 소속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부대에. 둘 다.. 2024. 3. 12.
혼자 남은 세상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작은 노트를 펼쳐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다. 제 작은 제자가 선물해 준 목걸이와, 제자를 배웅해 준 것, 자신이 내뱉은 이별의 말들, 그때 느꼈던 기분. 완벽한 기록으로 남겨놓고 나서 책장 한편에 책을 꽂았다. 문득 이 세상이 보고 싶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항상 이랬던 것 같다. 그는 영원히 멈춰있을 것만 같은 걸음을 옮겼다. 황량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늘 봐오던 풍경이었다. 오로지 잿빛의 세상을 눈에 담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릴 것이고, 또 지겨울 만큼 눈에 담을 곳을 필사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그 자신도 몰랐다. 아마도 영원히 모를 듯싶었다. 시야에 아지랑이가 서서히 피어오른다. 그것을 느끼고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황폐화된 도시를 감싸고 있던 .. 2024. 3. 10.
생존자의 제자. 내 선생님은 참 가련한 사람이다. 모든 기억을 잃고도 지킨다는 의무를 저버리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다른 시간선으로 넘어갔지만, 그곳에서 만난 가련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본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유 없는 친절함을 베푸는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지만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로워도 외로운 줄 모르는 사람. 세상에게 버려졌으나 끝내 세상을 버리지 못한 사람.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독하게도 사람이었던 존재. 그 가녀림을 사랑하지 않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약한 존재였다. 숨 한 번에 바스러질 내 생명을 질긴 줄로 만들어준 그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잊어버린다. 무한의 기억을 잃어버.. 2024. 3. 10.
드디어 마주한.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3. 6.
은빛의 수호자. 그는 눈을 떴다. 투명하게 빛나는 눈 위에 그려지는 풍경은 항상 똑같았다. 자신의 일족, 은여우를 구하기 위해 검을 들었고, 필멸자의 한계를 벗어난 그는 스스로를 제단 아래에 놓인 석상으로 만들었다. 석상의 봉인을 풀 주문을 일족에게만 알려준 채로. 일족이 위험해진다면 봉인을 풀도록. 그리고 봉인을 풀 여유도 없을 정도로 급박해지는 상황이라면, 일족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어버린다면 영원히 석상으로 남아 부서지도록. 그가 눈을 뜬다는 것은 결코 좋은 뜻이 아니었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잘 손질된 은빛의 검을 허리춤에 차고 제단 아래로 내려가 문을 나선다. 흐릿한 꽃내음과 수많은 장식들이 보인다. 그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최소한, 큰 혼란은 없어 보였다. 어떤 문제가 있길래 그가 깨어난 것인지 그는 알 수.. 2024. 3. 4.
땅거미 질 무렵에.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온갖 어둠과 비난이 난무하는 때. 타들어가는 낮도 차갑게 식은 밤도 아닌 가장 어스름할 때. 머지않아 밤이 찾아오고, 어둠이 세상을 가득 메울 때면 밤을 거니는 사람의 시간이 시작된다. 강렬한 주황빛의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 가느다란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내리 깔린 그림자가 화답하듯 꿈틀거린다. 에메랄드빛 파도를 닮은 눈동자가 매끄럽게 굴러간다. 그림자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사람보다도 더. 수많은 목소리를 듣는 그림자를 다루는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켠다. 공중에 떠다니는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가볍게 날아오른다. 귀 대신 자라난 두 쌍의 날개가 얕은 바람을 일으키더니 몸을 공중에 띄운다. 밤의 찬 향기가 눅진하게 몸속으로 녹아든다. 이윽고 완전한 어둠.. 2024. 3. 2.
영혼의 꽃내음. 장작이 타는 소리에 기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잠시 시선을 굴린다. 머릿속에 무언가 느껴지는 감각도 슬슬 익숙해지나 싶었다. 그저 가만히 장작을 보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린다. 잠이 잘 안 오는 밤이지? 그 목소리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밤하늘이 유난히 높게 느껴졌다. 밤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땅에 쏟아질 듯했다. 내일 또 하루종일 움직이려면 잠에 들어야 하는데, 영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는 그동안 네 얘기를 안했구나.” 그렇게 운을 뗀 셰도하트가 그를 바라본다. 나는 드로우인데?라는 대답을 내놓았으나, 그가 다른 드로우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었다. 그는 다른 드로우처럼 오만하지도 않았고, 함부로 깔보지도 않았으며 또한 낙천적으로 보이기까지.. 2024. 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