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208 눈물의 시대 - 흰 꿈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단 몇 명이 하루나 이틀 정도 꿈을 꾸는 것이었으면 이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집단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어 가장 질 나쁘고 끔찍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이것이 모두가 꾸는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악몽을 꾸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악몽을 꿀 때마다 고유 능력이 약해져 갔다는 것도 알았다. 사고율이 높아졌다. 교통사고나 산업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범죄율도 치솟았다. 악몽이 현실에도 도래한 것만 같았다. 사이비 종교가 힘을 얻고, 기댈 곳이 사라져 가는 이 세상은 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탄했다. 눈물을 흘.. 2024. 12. 2. 암야의 끝자락. 남부에서는 기괴한 평온함과 느릿한 절망이 늘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숨이 끊어진 육신을 정성껏 약품처리해 움직이게 하는 귀찮은 짓을 하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맞서는 이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기도 했고, 버림 패로 쓰기에 딱 적당했다. 자아도 뭣도 없으니까. 그저 지시한 것만 행하는 로봇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남부를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로봇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악질적인 것 말이다.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시체를 조종하는 것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일이 되었다. 무엇이, 어떻게 경악스러우냐 묻는다면 시체를 이용해먹는 과정이다.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흡사 지옥도와 같은 광경.살아있을 적 망가진 어깨와 .. 2024. 11. 28. 암야의 왈츠. 연화는 남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부의 따스한 햇살이 빚어놓은 것만 같던 사람이었으나 남부의 소란과 침묵을 생각하노라면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것도 없었다. 연화는 다정함을 알았고, 사랑을 알았으며, 아낌을 알았다. 그것과 함께 피와 폭력을 알았으니, 부당함에 맞서는 것이야말로 그의 적성에 꼭 맞았으리라. 맑은 밀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는 것이 느껴진다. 시원스럽게 흐드러진 것이 꽃잎 같더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아이들. 심장을 가득 채우는 꽃내음. 사랑들아, 이리로 와. 애정 한 움큼 집어넣은 모든 말이 화사했다. 어린아이들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웃는 모습은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손에 닿는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한껏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며 웃는 것이 마치 동화에나 나올법한 천사와 어린.. 2024. 11. 26. 마음정리. 너는 그렇게 다 남기고 떠나서 정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왜 이렇게 어지르기만 해 놓고 가는 건지 알 수도 없다. 들이켜는 숨에서는 물기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상실의 메마름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온통 쉬고 싶다. 이 어질러진 마음의 방에 하염없이 누워서 쉬고 싶었다. 누군가를 놓아주는 것을 정리한다고 한다. 나는 늘 정리를 어려워했고, 너는 늘 정리를 잘했는데. 그렇다면 떠나는 건 내가 해야 맞는 게 아니었을까? 내가 가면 너는 내 흔적을 차곡차곡 잘 정리했을 텐데.네 습관을 따라 은색 열쇠는 항상 오른편에, 동색 열쇠는 항상 왼편에 두었다. 가끔 반대로 놓으면 잘못 놓았다며 웃는 소리를 내는 네가 좋아 이따금 반대로 두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내 사소한 습관, 모든 정리정돈에.. 2024. 11. 24. 원망과 그리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모호해서, 쉽게 혼동하곤 한다. 혹은 영원한 것은 없으니 아주 길고, 길게 늘어져서 뒤섞이고 만다고... 그러니 그리움과 원망은 아주 가깝게, 정답게 부둥켜안고 있으니 하나를 품게 된다면 다른 하나도 가지고 마는 것이다. 헬렌 리시안셔스는 그리움을 느낄 상대도, 원망을 느낄 상대도 없었기 때문에 둘을 더 쉽게 혼동했다. 어쩌면 둘 다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야, 그럴 것이 아닌가? 가장 원하던 순간에, 가장 원하던 가족이라는 존재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니... 사실은 그리움보다도 원망이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온전히 원망하기에는 헬렌 리시안셔스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다정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다정함이 가족에게도 적용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있어 .. 2024. 11. 20. 나의 친애하는 절망감. 아무렇게나 깨진 유리만큼 날카로운 모래를 찢어진 폐 안에 밀어 넣고 까맣게 타들어가는 약초 막대를 입에 물고 있는데, 하늘은 또 빌어먹도록 파래서, 지옥의 빛깔은 이토록 파랗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지옥 안에서 서로를 떠받들고 있다. 혹은 밀어 넣고 있거나. 그래. 생매장. 생매장이다. 이건 분명 생매장이다. 희망도 묻고, 시체도 묻고, 살아있는 것도 묻고... 모든 것을 차가운 흙더미 속에 밀어 넣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으니 우리의 삶은 오로지 무가치함으로 증명되었다.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 하. 왜, 더 크게 비웃어줄까? 큭큭대며 웃음을 삼킨다. 삼킨 것에서 쓰린 것이 느껴진다. 하하... 너무 웃겨서 그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잘도 지껄인다. 사람은 희망 없이도 살 수 있다. .. 2024. 11. 18. 영혼이란 종잇장과 같아. 주의: 텍스트 고어, 유혈, 살인 영혼, 영혼을 다해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토할 것만 같다. 머리가 찢어져 그 사이로 피가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렁거린다. 속이 불편하다. 위장이 뒤틀린다. 그토록 지우려고 노력한 빛나는 과거의 한때와 피와 폭력, 강제로 굴복시킨 것, 오롯이 더러운 것으로 기워진 기억들이 소용돌이처럼 뒤섞인다. 피부 위로 무언가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피부 아래에 궤양이 들끓는 착각과 함께 소용돌이친다. 더럽고 역겹다. 새파란 눈 안에 사랑하던 기억과 끔찍한 폭력의 기억이 뒤섞인다. 무엇을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세레니아스라고 불리던 자는, □□□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 황금 장식이 붙은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차가운 .. 2024. 11. 14. 돌아갈 곳. 그러니까, 집이라는 것은... 편한 곳.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괴롭지 않고, 거리낌도 없는... 그렇다면 나에게 집이라는 곳이 존재하나? 아니, 애초에 있긴 했었나? 자조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질문이다. 은설화는 흔한 슬픔조차 없는, 아무것도 담지 못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초목색의 눈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쓸모없는 물건들을 본다. 반쯤 불타고 남은 책. 제법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것처럼 보여서 그랬나? 어차피 은설화는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 소중한 것을 절대 가문 안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았다. 애초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거의 없었고... "소월아." "네, 아가씨." 오래전부터 함께한 호위무사는 설화의 곁에 선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월은 설화만을 지켰.. 2024. 11. 10. 침묵하는 불안. 그는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물의 소굴이라고 들었으나 그저 마물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는데, 대체 사전 조사를 얼마나 허술하게 한 거지? 게다가 마물들은 계속 독까지 뿌려댔다. 포르투나. 이 독, 계속 정화할 수 있어요? 치유 마법을 몸에 건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누적되는 피로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고개를 주억이곤 검의 손잡이를 꾹 쥔다. 검의 손잡이 위로 순백색의 빛무리가 일렁이며 칼날을 만든다. 손 안에서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늘 잡아온 무기에서는 들뜨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지도 않은 평이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검을 유연하게 휘두른다. 가볍게, 마치 산책하는 듯한 걸음이었다. 위로 치고 올리고,.. 2024. 11. 9. 새로운 칵테일 바에서. 밤에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하다. 서늘하게 식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두어 번 문지르다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하던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아 나와서 하염없이 앉아있었더니 어느덧 밤이었다. 밤하늘에 느릿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인다. 술이 먹고 싶다. 그러니까... 칵테일. 칵테일이 먹고 싶었다.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다가 몸을 일으킨다. 이 근처에 바가 있으려나.마가렛은 술을 즐기는 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칵테일을 좋아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한 잔에서 두 잔, 좋은 일이 있거나 기쁜 것을 나눌 때는 네 잔에서 다섯 잔까지. 절대 과음하지 않을 정도로. 가끔 너무 가라앉을 때면 술을 퍼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으나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 2024. 11. 7. 이전 1 2 3 4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