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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208

태양 조각으로 빚어진. 처음에 그곳은 공허였다. 암흑과 빛만이 있었다. 처음이라고 할만한 지점에는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그저 무수한 반짝임만이 있을 뿐.인식 없는 존재함이 어떤 의미가 있냐 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미도 없는 곳에서 수많은 반짝임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것을 빚어냈다. 그것이 생길 때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고, 특별한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금에 와서 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그때에는 없었다. 있었어도 없는 것과 다름이 없는 까닭이었다. 존재의 탄생이라고 함은 오로지 인식에 있다. '이것이 여기에 있노라'는 생각. 모든 것은 그것으로 성립된다.그렇게 수많은 반짝임이 그저 존재하기만 할 때, 누군가가 그것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수많은 생명이, 인간이 그것에 '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24. 11. 6.
서부에서의 답신. 이전 글과 이어집니다.비밀번호: 241103내 친구이자 멘토, K에게.안녕하세요, K.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쓰려고 종이를 펼친 참이에요. 사실 이전의 편지를 보내고 많이 후회했어요. 당신이 북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호기심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책을 완성해야겠다는 열의도 함께요.일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북부에 대한 책을 쓰고 있어요. 바로 얼마 전에 남부에 대한 책을 다 쓴 참이거든요. 책을 한 권 동봉해요.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자연에 대한 찬미, 긴 겨울의 웅장함, 신과 신성에 대한 특별함보다도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싶었어요. 그 모든 일들 말이에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북부에 대해 .. 2024. 11. 4.
북부에서의 편지.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11. 3.
일상. 얼굴 위로 드리우는 햇빛이 난폭하다.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공기가 텁텁하다. 이제 곧 가습기를 꺼내놔야 할 날씨가 온 탓인가. 죽은 듯이 누워만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침대 머리맡 금속 탁자를 손으로 느릿하게 더듬다가 물컵을 들고 목을 축인다. 컵을 씻어야겠다. 그리고 물을 새로 따라야지. 어제 읽다가 만 책이 손끝에 걸리적거린다. 그래, 책도 읽자. 책을 펼치기 전에 샤워를 하고, 그리고 그전에 컵부터... 물을 마셨음에도 입안이 여전히 텁텁하다. 건조함에서 비롯되는 텁텁함이 아닌 탓이다. 뻑뻑하게 메마른 눈을 감았다 뜨곤 몸을 일으킨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수건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몸을 숙이는 것도 싫어 컵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설거.. 2024. 10. 30.
검붉은 시스템. 내부 훈련실에 조명이 들어온다. 붉게 깜빡이는 조명이 곧 푸르게 빛난다. 어두운 실내가 차츰 밝아진다. 아이리스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고, 연보랏빛의 긴 머리칼을 높이 올려 묶는다. 마젠타 빛으로 반짝이는 강렬한 눈이 올곧게 앞을 바라본다. 조명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곧 어떤 기계- 혹은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 말을 걸어온다. 컴퓨터 그 자체인 존재. 사람에게 AI 시스템을 이식해 초지능을 가지게 된 것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정부의 건물 내부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 훈련 강도는 몇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 "8단계." × 경고. 아이리스 님은 40시간 전 6단계에 해당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원활한 훈련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계를 낮추는 것을 .. 2024. 10. 28.
黃昏과 Halloween 언니! 그 부름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거니와, 달아람은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만히 누운 채로 고개만 슬쩍 돌리니, 슬그머니 열린 창문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가벼운 한숨을 쉬곤 몸을 일으킨다.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뒤에 겉옷 하나만 대충 걸치고 창가로 간다. 창틀을 두드리고 차오르는 바람이 매섭다. 언제 또 이렇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는지. "언니, 오늘 남부에 가지 않을래?" "결론부터 말하는 그 화법은 어떻게 못 하겠냐?" "에~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창틀에 몸을 기대서 생글생글 웃는 낯을 가만히 보다가 이마를 한 번 쥐어박는다. 악! 아픈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집 안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 2024. 10. 26.
언젠가의 미래에. 그는 언제나 화가 난 채였다. 갈길 잃은 분노는 삶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긴다. 모든 시간을 분노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분노로 살아가지 않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러워질 정도로 폐부가 쓰렸고, 이따금 입에서는 붉은 핏덩이가 쏟아진다.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은 기생꽃의 향기에 토할 것만 같았다. 죄스럽다. 원망스럽다. 원하지도 않은 병을 얻고 옳다구나 하고 버린 가족이라는 작자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결국은 온기를 바라고 마는 사실이었다. 멍청한 것아. 미련한 것아. 바보 같은 것아. 이제 온기를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기어이 바라고 말아서. 역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죽은 지 한참 된 시체보다도 찬 공기가 .. 2024. 10. 17.
생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하필 머리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적갈색의 긴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귀찮네. 혀를 한 번 차곤 손에 들고 있던 큰 톱을 어깨에 걸쳤다. 불만 녹아든 표정이 매서웠다. "마수 처리가 덜 됐으면 회수자가 아니라 용병을 불렀어야지." "서부 마물에 대해선 엔간한 용병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워낙 급하기도 했고.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넉살 좋게 말을 늘어놓는 용병을 가만히 노려보다 한숨을 쉬곤 대충 걸치고 있던 톱을 고쳐 잡는다. 마리당 추가금 붙는다. 당연히 드려야죠! 성격 좋긴. 그리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곤 톱을 휘둘렀다.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도 뭣도 아니었으나 모든 행동은 강렬하고 빨랐으며 정확했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정확히 약점을 파고 들어가는 모.. 2024. 10. 16.
아무렇게나 골라낸. 기준도 없이 아무렇게나 솎아내 버린 것. 버려진 것들의 무덤. 쓸모없는 자들의 지옥. 볼란트는 이 땅을 무가치의 정원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태어난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불로를 타고난 자는 불사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이 푸르고 하얗기만 한 땅에서는 풀조차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백야와 극야가 오가는 흑색의 광야였고, 혹독하게도 시린 곳이었다. 이 땅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버리고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모든 버려진 것들이 모이는 땅에서 태어나 그곳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애초에 그 기원이 비난이고 고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탄생 자체가 슬픔이로구나. 버려진 자, 쓸모없는 자의 무덤이 되어버린 이 허연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 이 슬픔을 다.. 2024. 10. 14.
하염없이 떠도는. 그가 고향을 떠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궁금했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더 많은 곳을 둘러보며 경험하고 싶었다. 어떤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알던 누군가처럼 무언가를 지키고 싶기도 했다. 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힘이 생기고, 힘이 많아지면 지킬 수 있다. 그는 그런 생각을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키워갔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다고 여겼다. 다름은 차별을 불러온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이방인이었으니 어디를 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아버지, 저... 떠나려고요. 이미 준비도 다 했어요." "그렇구나. 어디를 가든 조심하렴." "저, 떠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 2024. 1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