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208 告白. 하늘이 어두웠다. 이곳에서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별일이네, 싶었다. 언젠가 이런 하늘을 보았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매캐한 것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이 비에 전부 씻겨 내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피엔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돌린다. 익숙한 기척. 소피엔은 익숙한 텍스트 창을 띄워 평이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만이 길게 감돌았다. 그것은 이제껏 마주한 위화감의 정체와 같기도 했고, 혹은 길게 외면하고 만 마음의 한 자락 같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 얼마나 있든 소피엔은 그런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실래요? 목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으나 그는 그런 모양을 곧잘 알아보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 2024. 10. 8. 다정으로 살아가는. 차가운 땅의 바람은 여전히 혹독했다. 숨 한 번을 내쉴 때마다 생이 한 움큼씩 사라져만 가는 착각이 번져 나간다. 한때는 웃음소리가 번졌을 땅, 또 언젠가는 비명소리만이 만연했을 이 땅 위에는 소름 끼치는 고요함만이 머물렀다. 끔찍하게도.눈앞에 보이는 자는 한때 사랑했던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정 반대의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마저 묻혀 사라질 허연 눈밭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띤 자였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라고 해야겠구나. 더 이상 그녀를 닮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는 소름 끼치기만 했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기나긴 전투의 마침표를 찍으려 했을 뿐.작은 입김이 흘러나.. 2024. 10. 7. 열어보지 않은 편지.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오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평범한 인사를 써버리고 말았네요.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을 때쯤에는 제가 그곳에 없겠죠.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이라면 내 편지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어떠한 필연적인 과정을 겪을 때, 그것을 말로 다 이루기 힘든 순간에 뜯어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혹시 이 편지를 뜯어보지 않고 버린 건 아니죠? 그렇다면 조금 서운하겠지만... 뭐, 어떡해요. 당신은 내 기대에 보답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나는 이 편지를 당신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여기에는 밤이에요. 구슬 같은 동그란 보름달이 높게 떠 있어요. 눈가에 자라난 꽃잎 때문에 조금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이 풍경을 담아내.. 2024. 10. 4.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 [ 가명 씨, 화상 흉터가 있는 게 심하게 불편하다면 피부 이식 수술을 받는 게 좋을 거예요. ] 단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조용히 퍼진다. 화상 연고를 보고 있던 그는 멋쩍게 웃었다. 그는 소피엔의 공방에 자주 찾아왔고, 물건을 자주 사갔다. 특히나 화상 연고는 매번 사가는 것 중 하나였다. 신체의 절반이 화상 흉터로 뒤덮였지만 수술을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라고 묻는다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하고 싶지 않았다. 잊어버린 과거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감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그는 잠시 침음을 흘리며 손끝으로 제 상처를 더듬었다. 신경이 거의 다 죽은 피부에서는 감각이랄 것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나름 멀끔한 .. 2024. 10. 3. 필요에 의한. 바닥에 구두가 닿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걸음소리를 내었다. 타오르는 보라색 하늘을 담은 자는 황금색 눈을 느릿하게 굴린다. 이내 시선 안에 담기는 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어 팔짱을 낀다. 가볍고 부드러운 미소를 걸친 얼굴은 한 치의 의심도 할 수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에르, 오래 기다렸어? 다정한 목소리가 옅게 흐른다. 이름이 불린 이도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긴 머리칼을 조심히 넘겨주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루벨. 오래 기다렸다고 해도 괜찮았을 거고요." "다행이네. 그런데... 같이 있던 분은?" 루벨라이트의 시선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시선의 끝에 머무른 사람은 멋쩍은 듯 짧게 기침하고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또 다른 사람이 붙은 거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에 당신은 오는 길동안 괜찮았.. 2024. 10. 2. 숲의 괴물. 검다고 느껴질 법한 수풀이 우거진 그곳에는 괴물이 산다고 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왜 시작되었을지 모를 소문은 그저 하염없이 떠돌기만 했다. 숲 안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닌 것, 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느릿하게 눈을 감는다.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비방과 같다. 다만 그러한 나약하고 힘없는 비방에 신경쓰지 않는 성정이었으니 다행일까, 이유 없는 맹목적인 비난이 저도 모르게 익숙해져버린 것이었으니 불행일까... 그것은 눈꺼풀을 닫아 시야를 까맣게 했다. 암전된 시야의 한 구석에서 색이 다 바랜 추억이 떠오른다. 빛이 강할수록 그 아래에 있는 것은 쉽게 닳을 수밖에 없다. 다 헤진 추억 속에서는 다정한 사람들과, 매정한 사람들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 하염없이 교차한다. 수많은 생명이 곁에 머무르.. 2024. 10. 1. 의체는 소모품. 의체 제작 및 수리가 가능한 기술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을 꼽아보라고 하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의체는 소모품이다'.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의체가 나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끊임없이 조정하고 고쳐야만 했다. 기술자마다 숙련도와 스타일이 달라서 기술자를 바꾸면 쉽게 망가지는 경우도 생긴다. 무엇보다 의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는 자신이 사용하는 의체는 언제까지나 괜찮을 거라고 믿는 기묘한 확신이 있다.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는 일반적인 현대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큰 고장을 겪고 나서야 찾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다만 이번 경우는 많이 달랐다.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 묻는다면, 이번에 수리해야 할 의체는 설계 과정부터 엉망인 것처럼 보였다. 남부에서 자주 쓰.. 2024. 9. 30. 의체 수리. 소피엔은 손을 가볍게 움직인다. 부드러운 손짓에 조금은 어둑했던 천장에 간접 조명이 깜빡이며 밝아진다. 손끝에 푸른 네온빛이 반짝인다. 궁륭 천장으로 햇살이 들어와 밝아지는 것만 같은 내부에 네온빛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내부에 있는 이름 모를 기계들은 기묘한 부조화를 한층 누그러트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잠시 기기 몇 대를 체크한다. 늘 하는 과정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다. 그가 아무리 무언가를 고치고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특히나 어려운 것을 수리할 때에는 긴장감이 더 커졌다. 겨우 그것 때문에 실수할 일은 없었지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가벼운 체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긴다. 휠체어 바퀴가 맑은 조명을 받아 스테인드글라.. 2024. 9. 29. 모순적인 평화. 별의 아이라고 불리던 이, 이제는 비셰라고 불리게 된 아이는 굳게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강렬하게 내리쬐던 빛이 없으니 눈을 뜨기가 한결 편안했다. 비셰는 작은 손을 뻗는다. 흉터와 상처로 뒤덮여있던 손이 거의 다 나았지만 어떤 상처는 계속 낫지 않았다. 자그마한 움직임에 비셰를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것, 재앙신이라 불리는 현자가 말을 건넨다. 잘 잤니?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에 비셰는 곱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잘 잤어요. 키넬 님은요? 그는 곧 큰 손을 뻗어 작은 아이의 머리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잘 잤다고 화답하며 작은 이를 내려다본다. 섬뜩하게 갈라진 눈 안에는 온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람과는 다른 존재였으나 오히려 다르기에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사람에 의해 상처받은 아이는 .. 2024. 9. 27. 끝나지 않는 악몽. 잠시 눈을 감기만 해도 떠올릴 수 있다. 누군가의 피와 비명소리, 끔찍한 나약함으로부터 기어올라오던 참극. 한껏 찌푸린 표정으로 감았던 눈을 뜬다. 한낮의 푸름을 닮았던 눈은 이제 탁한 하늘의 색을 띤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책상 위를 더듬는다. 작고 반짝이는 유리병을 집어들어 그대로 마개를 열어 무색무취의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는다. 도로 의자에 기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진다. 수면제에 취해 잠에 든다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깨어있을 때는 환상통이 함께하고 잠들어있을 때는 악몽이 함께하는 가련한 사람아. 그는 긴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쨍한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한껏 찌푸린 표정이 겨우 펴진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림에 고개를 잠.. 2024. 9. 25. 이전 1 2 3 4 5 6 ··· 2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