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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208

상처로 얼룩진 생이여. 지독한 삶이다. 그 단어가 정확히 어떤 것을 표현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지금껏 들어온 수많은 말은 이 삶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했고,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눈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진다. 한쪽 눈을 파고든 마기, 저주가 한쪽 눈을 좀먹어간다. 이제는 피가 흐르지 않지만 무언가가 계속 흐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일까. 흐르고 있는데도 모르는 피일까.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손으로 닦아낸다. 그것의 색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눕는다.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며칠이 지나간다. 혹은 몇 주였나? 시간이 번잡스럽게 어지럽혀진다. 눈을 .. 2024. 9. 7.
復活?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것을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한 생명은 그대로 썩어 사라짐이 마땅하나, 이따금 그것을 하지 못하는 생명도 있다. 마물의 핵이 사람의 시체에 자리 잡는다면 새로운 마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 마물이되 마물이 아닌 것. 사람의 의지를 놓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그 사람이 살아난다면... 부디 아주 조금의 가능성을 가진 모습으로 살아나길, 그렇게 바랐다. 그러니 이것은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밝고 상냥했던 사람이 어째서 지금은 얼어붙은 육신으로 고대 마물의 힘을.. 2024. 9. 5.
거짓말. 그는 불안했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 그리 물어본다면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간직한 마음인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언젠가의 두려움 같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차갑고 서늘한 곳에서 피어오른 온기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일렁인다. 마음이라는 것이 일렁거리고 울렁거린다. 금색 시선의 끝자락에 녹음 가득한 시선이 맞물린다. 눈을 마주친 이는 밝게 웃었다. □□, 무슨 생각하고 있어? 친우의 목소리. 언젠가 떠나가버릴 것만 같은 자의 목소리였다. 마치 무언가를 길게, 아주 길게 준비한 것만 같은... "..." "오늘따라 반응이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어? 넌 언제나 걱정이 많았잖아... 2024. 9. 4.
가치있는 세상. 이 세상은 가치 있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상이었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생명이 자라난다. 아스테르는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겼다. 눈이 멀듯한 흰 설원은 사실 죽은 자의 뼈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디찬 세상은 잔인했고, 혹독했다. 검게 그을린 듯한 탁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황혼의 가장 어두운 분홍빛을 빼와 박아 넣은 듯한 눈은 늘 생기가 없었다. 북부의 종교는 잘못되었다. 이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 아스테르는 언제나 그랬듯 침묵하기를 택했다.겨울은 눈물과 고요의 계절이다. 모든 소리가 눈에 파묻혀 사라진다. 의미 있는 것은 없었다. 생이란 부질없다.. 2024. 9. 4.
무덤의 세계. 이곳은 안식처이다. 안식이란 곧 죽음을 뜻했고, 이윽고 숨을 쉬지 않게 된 생명은 탁류를 타고 흘러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그곳을 사후세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곳을 죽은 자들의 화원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누군가는 무덤의 세계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많은 세계였다. 관을 이고 걷는 괴수와 닮은 것. 더 이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것들이 잿빛의 세계를 영원히 배회한다. 생명의 종말이 바람처럼 휘날린다. 한때 살아있던 피부, 이제는 썩어 문드러지는 살갗에 닿는 감각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다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니, 아, 정말 죽음이 가까워지는구나. 그리 생각한다.제 이름조차 버리고 영웅이라고 칭해진 자는 죽은 자들의 화원 속에서 시들어간다. 한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 2024. 9. 3.
고요한 숲의... 숲의 초목에서 비롯된 생명은 호기심도, 겁도 많았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그의 본질이었으나 그것을 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길었던 이는 누군가가 자꾸만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죽음이란 본디 익숙한 개념이었으나 생명이라는 야트막한 것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하물며 주어진 시간이 이토록 차이 나는 것이... 멜리아레켄스, 메르라고 불리던 이는 오로지 홀로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었다. 모두 그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죽음이란 모든 생명에게 찾아오는 일이었는데, 필연이었는데, 멜리아레켄스는 타인의 죽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혼자였다. 하지만 혼자는 너무 외로웠다. 이따금 절박함을 느끼기도 했다. 죽지 마, 죽지 말라고. 여린 물빛 머금은 이는 죽음의 정.. 2024. 9. 2.
빛 들지 않는 지하.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을 돌아다니는 탐험가는 햇살이 없는 것이 익숙했다. 오로지 등불 하나만 들고 지하를 탐험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었으나 높은 위험에는 높은 보상이 따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랄까. 탐험가는 가지고 있던 캔 하나를 따서 식사를 즐겼다.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가니 슬슬 돌아가야만 했다. 세상으로 돌아가면 또 여러 이야기가 따라붙겠지. 이번에도 돌아왔다느니 하면서. 세상은 늘 가십거리를 원했기에 탐험가는 그것에 질려 오로지 가장 깊은 곳만을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누리는 평화는 외롭기도 했지만 평화롭기도 했다. 평화와 외로움은 비슷한 것이라. 온종일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큼은 지독하게도 피곤했다. 애써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 2024. 9. 1.
안개 가득한 곳은. 지금 이 상황을 간단히 세 마디로 표현하자면, '망했다'에 가까웠다. 그것을 그나마 풀어서 말하면 '남의 충고를 제대로 새기지 않고 걸음을 들여 큰일이 났다'이고. 숲에 안개가 자욱해질 때는 걸음을 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심각하게 여긴 것 또한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W는 한숨을 흘린다. 눈이 있었다면 질끈 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부야 워낙 비밀이 많고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았으나 안개가 자욱한 숲만큼은 정말 익숙해질 일이 없었다. 아무리 동부를 오래 오간 사람이라고 해도 길을 잃기 십상인데 무슨 생각으로 발을 들인 건지. 무엇을 어찌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분명 마을의 어르신이라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을 쉬이 허락하실 분이 아니셨으.. 2024. 8. 28.
예상치 못한 만남. 중앙지역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특별한 수업을 한다. 서로 학년이 다른 두 학생이 무언가를 함께 배우거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멘토-멘티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불러왔기 때문에 꾸준히 시행되는 일이었다. 플론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당연히 멘토-멘티가 있었고, 플론은 어느 부분에서나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는 것에 더해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도 잘 해냈다. 플론은 늘 멘토의 역할로 다른 학생과 페어를 맺었다. "안녕하세요, 플론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루비...라고 해요." 이름 그대로 붉은 보석 같은 머리칼과 반짝이는 사과의 농익은 색을 담아낸 눈이 인상적이었다. 자신감은 조금 없어 보였지만, 그런 것은.. 2024. 8. 28.
다정하고 매정한, 그리고 찬란한. 헬렌 리시안셔스는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온 그 순간. 어린 날의 헬렌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혼자였다. 그때 느꼈던 슬픔은 말로 다할 수도 없었다. 너무 외롭고 슬펐다. 시간이 지나며 그러한 외로움은 사라져 갔지만, 어느 순간에는 문득 그런 외로움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의 흔적은 잊으려 하면 떠올라 자꾸만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헬렌의 시선 끝에 머무른 아이는 너무 작았다. 그렇게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저보다도 더.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고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무서워하지 않도록. 아이는 그런 헬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 저기." "네, 블리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 안.. 2024.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