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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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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차가움. 앨리스 디샤는 굉장히 냉소적인 정령이었다. 머금고 있는 색만큼은 굉장히 온화하고 따뜻했으나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냉소적인 표정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장미를 씻어낸 물에 담가둔 것만 같은 연분홍빛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기에는 조금 모자라고, 흰 속눈썹 안에 자리 잡은 오묘한 빛깔의 눈은 구슬처럼 반질반질 빛났다. 쉬이 다가갈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는 봄날의 따사로움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얼어붙고 마는 차가운 겨울을 닮아 있었다. 자연에서 탄생한 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매서웠고, 혼란스러우며, 다정한 만큼 매정하기도 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앨리스를 스쳐 지나가 저 멀리 향했다. 겨울꽃 향기가 지천에 깔린다. 차갑고 고요한 향기에 피부가 따끔거릴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람을 좋아.. 2025. 1. 22.
찬란한 저주. 명은 살아남았다. 상처 가득한 육신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정신을 끌어안은 채로 살아남았다. 옛적부터 운이 좋은 사람이었으니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도 되는지, 살아남아 얻은 고통은 누구에게 보상받아야 하는지, 애초에 보상을 해줄 이가 존재하긴 하는지...참을 수 없는 통증이 엄습한다. 몸의 안쪽에선 온갖 날카로운 주술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심장을 쥐어뜯기는 감각, 바람을 타고 저만치 밀려나는 감각 따위가 사고를 마비시킨다. 주술의 삿된 기운이 자꾸만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몸 이곳저곳에 멍이 들었다. 이따금 피를 토하기도 했다. 속이 찢어발겨진 감각이 매 순간 밀려든다. 애써 정신을 붙들고 있노라면, 또 어설.. 2025. 1. 19.
바람이 불어오는. 어떤 다정은 바람과 같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고목을 부러트린다. 불길을 키운다. 쓸려 나간다, 모든 것이. 의미도 없이. 뿌리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이고 전부 흩어진다. 유약한 사람은 다정함에 숨이 막혔다. 그것은 너무 강인해서 그것에 자꾸 휩쓸려 사라지는 것이다."..."눈앞에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이상하다, 이렇게 흐릴 리가 없는데. 펜비는 결국 차가운 감각에 휩싸인다. 이토록 시린 여름이라니. 찬 바닷물이 무릎의 언저리에서 일렁거렸다.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하는 소리, 비명과 같은 외침... 잠시 감고 있던 새파란 눈이 느리게 뜨였다. 다정한 걱정이 손끝에 닿는다. 다정, 다정함이여. 너는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굳센가. 이토록 강인한가. 어째서 이토록 봄볕처럼 따뜻하면서도 서리 내리는 아침.. 2025. 1. 17.
글의 바다 - 감상문 저번 비행에 이어 작성하는 두 번째로 쓰는 감상문입니다.비행은 책을 덮을 때 비로소 그것을 준비하는 느낌이었다면, 글의 바다는 첫 장을 펼쳤을 때부터 이 안에 들어와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날개 없는 이의 날개 있는 삶과 뭍에서 꿈꾸는 바다라니. 낭만적일 수도 있지만 한때의 꿈결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 글의 바다에서 제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강렬한 물음이 떠밀려왔습니다. 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작가님도 이 고민을 마치 오랫동안 했던 것처럼 느껴졌어요. 삶이란 무엇이길래 이렇게 고통스럽고, 잔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기다리는가? 하는 것이요. 왜 영혼이 떠난 육신을 묻어야 하고, 왜 떠나간 것을 기억하면서 계속 그리워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에 대.. 2025. 1. 15.
달이 아름다워- 下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5. 1. 11.
달이 아름다워- 上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5. 1. 10.
변화의 바람.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은하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어딘가의 책임자로 있는 일이 익숙한 사람은 늘 비슷한 고민을 했다. 자신이 머무르는 곳의 문제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일을 혼자서만 할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많은 이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해야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었다. 지긋하게 감고 있던 맑은 파란빛의 눈이 뜨이고, 곧 매끄럽게 굴러간다. 목덜미에 겨우 닿는 깊은 바닷빛 머리칼이 유연하게 흔들거렸다. 책상을 툭, 툭 두드리다가 손을 거두곤 의자에 잠시 기댔다.다른 지역과 제대로 된 교류를 못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외지인에 대한 거부감이었고, 다음으로 큰 문제는 거리에  있었다. .. 2025. 1. 9.
슬픔의 결론. 한때는 이 삶이 기쁨으로 가득 차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의미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싫어하던 사람, 좋아하던 사람, 사랑하던 사람 모두. 마물의 먹이가 되었거나, 주술의 일부가 되었거나... 어쨌든, 블랭크는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눈처럼 흰 머리칼을 빛바랜 분홍 리본끈으로 느슨하게 묶어 내리고,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있노라면 찬 공기에 폐부가 찌그러지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 이건... 통증. 코끝에 스치는 피의 향기에 눈을 감았다 뜨면, 피보다 붉은 눈이 설원 위에서 무섭게도 반짝거렸다. 발치에 미지근한 숨이 닿았다. 아직 살아있는 것, 하지만 곧 죽을 것은.. 2025. 1. 7.
그림자가 일렁이는 여명 문득, 눈이 부시다는 착각이 일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곳의 풍경은 정갈한 도시의 모습이었으나, 그 안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아니라. 그러한 평온함이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찢어질 듯한 소음과 적막함, 또는 미약한 부드러움과 활기로 살아남은 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비슷한 형태에서 정확히 다른 지점을 바라보는 자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세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도시를 가만히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등급전을 치르는 지역을 굳이 중앙지역으로 해놓은 이유는 나름의 공정성과 실력의 편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역에 따라 나오는 마물도, 마물의 위험도도 다 다르니까. 하지만 궁금한 것은, 대인 전투가 실력의 기준이 될 수.. 2025. 1. 6.
겨울 축제. 겨울의 길거리는 제법 소란스럽다. 이런저런 행사가 연달아 붙어 있기도 하고... 이 근방에서 축제를 하던가? 그는 잠시 뒷목을 손으로 쓸다가 내린다. 손끝이 벌게져서 시린 느낌이 잔뜩 들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으면, 손끝에 차갑고 작은 것이 닿았다. 작은 금속의 느낌에 일순간 소름이 돋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내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던 것을 꺼내본다. 작은 연고. 누군가가... 아, 분명 우연히 갔던 곳에 있던 사람이 선물해 준 것이다. 이상하게 그곳에 갈 때마다 현실감이 없어서... 그게 꿈인가 하면, 이 작고 단단한 연고가 주머니 안을 굴러다니면서 현실감을 일깨워주곤 했다. 그는 연고를 다시 주머니 안에 쑤셔 넣는다. 손이 시리다. 꽃집은 분명 따뜻했는데. 문득 온기가 그립다는 느낌이 밀려.. 2025.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