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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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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의 아이러니. 바람 부는 소리가 거셌다. 방금까지 웅웅대며 퍼지던 소란과 비명이 씻겨나가듯 사라진다. 코어는 바닥에 어지럽게 퍼진 것을 응시한다. 바닥에 퍼진 것을 분석하는 듯 잠자코 바라보다가, 아이리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코어,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게 있어? 코어는 주변을 둘러본다. 밑까지 범위를 확장해 주변을 스캔했지만 잡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없습니다. 경계 구역에서 대기하십시오. 건조한 목소리가 끝나자 아이리스는 팀원들에게 가벼이 손짓했다. 돌아가 대기하라는 수신호. 그것을 확인한 이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이리스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코어는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주변을 계속 둘러본다. 일정 시간동안 특별한 위협이 없으면 돌아가도 됐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약한 진동이 퍼진다. 그리고 발걸음 .. 2025. 2. 14.
짙푸른... "펜비 씨, 손님이 오셨는데..." 펜비는 의료실 안쪽에서 상처를 소독하다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찾아올 손님이 있었나? 잡아둔 약속은 없었는데. 상처에 밴드를 감으며 생각하던 찰나에,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가 찾아왔다고? 남부 용병길드에, 혼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상처 위에 마저 밴드를 감곤 옷가지를 다듬어 말끔하게 정돈한다. 곧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리곤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가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걱정이 앞섰다. 정말 다치지는 않았는지,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혹은 다른 일이 있는건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고, 심지어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 정도는... 펜비는 어.. 2025. 2. 13.
애정의 빛깔은 슬픔 아만다는 급한 발걸음을 옮기며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자식처럼 여기는 이는 미련한 사람이었다. 인질 때문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니. 네 번의 총상에도 죽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 용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과거의 흉터와 지금의 상처 중 무엇이 더 아프냐 물어도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아팠으니까. 펜비는 총알을 마법으로 건져내어 겨우 지혈하고 있었다. 파란 그물 같은 막이 상처의 표면을 덮는다. 너무 늦은 걸음이 아닌가, 하는 익숙한 절망이 사그라들었다. 절망이 사라진 자리에는 또다시 익숙한 감정이 치고 들어온다. 분노, 모든 것을 씻어내는 강렬한 파도와 같은 감정 말이다. 아만다는 정부 소속의 사람을 바라본다. 무기를 꺼내 들고 싶었던 마음이.. 2025. 2. 12.
꿈과 깊은 새벽. 신은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듯 힘겹게 눈을 뜬다. 현실감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 어렴풋하게 흘러간다. 이건 꿈이다. 꿈 속의 마을은 익숙한 형태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고 본다면, 옛날 마을의... 언젠가 담홍이 말해주었던 형태였다. 이상한 꿈이네, 하고 있을 때 웃음소리가 들린다. 곧 축제가 시작한대. 이번에는 14일 동안 한다더라. 그렇게 오래 하는 축제가 있었나? 옛날에는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언니한테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나... 담홍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다. 신은 그런 담홍을 존중해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고. 하지만 단순히 축제에 관한 거라면... 그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축제에 관한 말만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했다. 말소리가 들리는 길을 따라 걸어간다. 굳.. 2025. 2. 8.
하늘 아래 담홍색 들녘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태양 아래에 서있다.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물결치며 그 사이로 햇살이 차오르니 금빛 머리카락이 마치 선명한 담홍색으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감는다. 햇살을 받아 붉어진 눈 안에서 기억이 떠오른다. 타오르는 불길과 그 사이에 어우러지던 감각, 숨이 막히는 것과 지독하게도 아름다웠던 하늘... 이제는 흐릿해져버린 과거의 파편을 끌어안는 것은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 저물어버린 이야기를 기억해야 했으니까. 기억하고, 또 노래해야 했으니까. 사람은 배운 대로 살아가며 익숙한 것을 쫓는다. 그것이 불행이거나 희생적인 이타심일지라도.감았던 눈이 뜨인다. 백색의 햇살이 눈부시다. 옥색과 하얀 구름색 눈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저 높은 하늘에서 쏟아지듯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 위를 훑고 .. 2025. 2. 5.
봄날의 축제 하늘에선 꽃잎이 비처럼 내렸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은 선명한 빛깔로 반짝인다. 담홍은 서서히 주황빛이 되어가는 하늘 시선을 한 번 주다가 생각에 잠겼다. 마을에서 곧 제사를 지낸다더라. 그 말에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졌으나 이내 생각을 말끔하게 지우고는 종종걸음으로 냇가로 향했다. 담홍의 동생들은 물장구를 치고 놀다가 그에게 다가간다. 언니, 언니야!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서 머리칼을 마구 쓰다듬는다. 우리 장난꾸러기들, 잘 놀고 있었어? 이제 곧 추워질 테니까 집에 가자. "어머니랑 아버지는 오늘도 안 와?" "으응... 아무래도 일이 많으시니까. 갈까?" 담홍은 막냇동생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유독 체력도, 건강도 안 좋았던 막내라 손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한 팔로는 막내를 안아.. 2025. 2. 3.
원망의 뜻은 그저 그리움이라. 파랗게 타오르던 하늘이 잿더미 속의 선명한 노랑이 되어가는 순간을 안다. 타오른다기에는 적막하던 고요 어린 노을이 단단해진 땅 위로 내려앉는다. 흰 구름이 혼처럼 떠돌았고, 평생 이름으로 부르지 못한 당신네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없었다. 여전하게도. 랑은 알면서도 침잠하는 것들의 이름을 알았다. 손에 쥐어진 기억은 데일 듯 뜨거우면서도 차갑게 식어가 이 미적지근한 피부는 노랑 속에 숨어든 어둠 탓에 화상과 동상이 오가는 것처럼 검푸르게 물들었다. 하늘의 그림자, 서서히 어두워지는 노랑이 세상을 푸르게 만든다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랑은 손에 쥐어진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름 없는 묘비 앞에 앉았다. 술잔 하나와 술병 하나를 내려두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름이 없다. 과거에서 멈춘 것.. 2025. 2. 2.
겨울의 설움. 티타라는 지난 며칠간 심각한 이인증을 앓았다. 육신에서 방출되는 느낌, 이 세상에서 훌훌 날아서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감각이 계속 함께했다. 억세게 눌러 잡고 있던 금속 도끼는 너무나도 무거웠고, 발에 닿는 눈은 차가웠다. 도끼를 질질 끌고 다니던 아이는 마치 이단 같기도 했고 천사 같기도 했다. 자아가 육신에서 방출됐기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 도끼로 마물을 내리찍으며 며칠을 걷기만 하던 날, 가족들과 가족처럼 여긴 사제들이 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나던 날이었다. 이윽고 그런 착각이 일렁거린다. 그 어떠한 것도 아프지 않았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착란을 불러온다. 서서히 발걸음이 느려진다. 죽음이 목전에 있다. 그 단어를 제대로 배운 적 없음에도 그것을 선명하.. 2025. 1. 31.
검푸른 빛깔의 이름은 침묵 신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다. 그중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가끔은 그 경계가 모호해서 관념과 현실 사이를 수없이 헤매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의 늪에서 헤매는 시간이 적다고 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주 헤맨다고 하기에는 그는 타인의 앞에서는 늘 웃고 있었다. 그러니 진정으로 헤매게 되는 것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 때였다.가게의 문을 닫는다. 문득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기시감도 미시감도 아닌 애매한 것 말이다. 신이 그 이상한 감각에.. 2025. 1. 27.
한밤의 빛. 카페 내부는 조명 몇 개만 놓여있어 제법 어두웠다. 카페라기보다는 바에 가까운 형태. 그 안에 있던 자는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곤 웃음을 머금는다. 이곳을 찾는 자는 딱 두 가지였다. 정보를 원하거나, 독을 원하거나. 한쪽은 진주알처럼 희고, 다른 한쪽은 물빛처럼 푸른 두 쌍의 눈이 조명에 반짝였다. 뭘 찾으러 오셨나요?"... 정보. 비싼 정보가 필요해."정보라. 테이블에 가볍게 몸을 기대며 웃었다. 돈이 없어 보이진 않지만 선금은 받을 거라는 말에 특별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침묵은 긍정의 의미라고 하던데, 나쁘지 않네요. 내 입장에서도 입 무거운 사람이 좋아서. 유리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달콤한 향이 풍기는 음료를 따른다. 미성년자처럼 보여서. 음료도 나쁘지 않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 2025.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