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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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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얼굴 위로 드리우는 햇빛이 난폭하다.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공기가 텁텁하다. 이제 곧 가습기를 꺼내놔야 할 날씨가 온 탓인가. 죽은 듯이 누워만 있다가 몸을 일으킨다. 침대 머리맡 금속 탁자를 손으로 느릿하게 더듬다가 물컵을 들고 목을 축인다. 컵을 씻어야겠다. 그리고 물을 새로 따라야지. 어제 읽다가 만 책이 손끝에 걸리적거린다. 그래, 책도 읽자. 책을 펼치기 전에 샤워를 하고, 그리고 그전에 컵부터... 물을 마셨음에도 입안이 여전히 텁텁하다. 건조함에서 비롯되는 텁텁함이 아닌 탓이다. 뻑뻑하게 메마른 눈을 감았다 뜨곤 몸을 일으킨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수건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몸을 숙이는 것도 싫어 컵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설거.. 2024. 10. 30.
검붉은 시스템. 내부 훈련실에 조명이 들어온다. 붉게 깜빡이는 조명이 곧 푸르게 빛난다. 어두운 실내가 차츰 밝아진다. 아이리스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고, 연보랏빛의 긴 머리칼을 높이 올려 묶는다. 마젠타 빛으로 반짝이는 강렬한 눈이 올곧게 앞을 바라본다. 조명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곧 어떤 기계- 혹은 사람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 말을 걸어온다. 컴퓨터 그 자체인 존재. 사람에게 AI 시스템을 이식해 초지능을 가지게 된 것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정부의 건물 내부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 훈련 강도는 몇으로 설정하시겠습니까? × "8단계." × 경고. 아이리스 님은 40시간 전 6단계에 해당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원활한 훈련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단계를 낮추는 것을 .. 2024. 10. 28.
黃昏과 Halloween 언니! 그 부름에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은 굉장히 이른 시간이었거니와, 달아람은 누군가가 저를 깨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만히 누운 채로 고개만 슬쩍 돌리니, 슬그머니 열린 창문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가벼운 한숨을 쉬곤 몸을 일으킨다.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뒤에 겉옷 하나만 대충 걸치고 창가로 간다. 창틀을 두드리고 차오르는 바람이 매섭다. 언제 또 이렇게 가을이 성큼 다가왔는지. "언니, 오늘 남부에 가지 않을래?" "결론부터 말하는 그 화법은 어떻게 못 하겠냐?" "에~이.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창틀에 몸을 기대서 생글생글 웃는 낯을 가만히 보다가 이마를 한 번 쥐어박는다. 악! 아픈 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곤 집 안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 2024. 10. 26.
언젠가의 미래에. 그는 언제나 화가 난 채였다. 갈길 잃은 분노는 삶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긴다. 모든 시간을 분노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분노로 살아가지 않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죄스러워질 정도로 폐부가 쓰렸고, 이따금 입에서는 붉은 핏덩이가 쏟아진다.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은 기생꽃의 향기에 토할 것만 같았다. 죄스럽다. 원망스럽다. 원하지도 않은 병을 얻고 옳다구나 하고 버린 가족이라는 작자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결국은 온기를 바라고 마는 사실이었다. 멍청한 것아. 미련한 것아. 바보 같은 것아. 이제 온기를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기어이 바라고 말아서. 역하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죽은 지 한참 된 시체보다도 찬 공기가 .. 2024. 10. 17.
생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하필 머리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적갈색의 긴 머리칼이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귀찮네. 혀를 한 번 차곤 손에 들고 있던 큰 톱을 어깨에 걸쳤다. 불만 녹아든 표정이 매서웠다. "마수 처리가 덜 됐으면 회수자가 아니라 용병을 불렀어야지." "서부 마물에 대해선 엔간한 용병보다 더 잘 아시잖아요. 워낙 급하기도 했고.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넉살 좋게 말을 늘어놓는 용병을 가만히 노려보다 한숨을 쉬곤 대충 걸치고 있던 톱을 고쳐 잡는다. 마리당 추가금 붙는다. 당연히 드려야죠! 성격 좋긴. 그리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곤 톱을 휘둘렀다.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도 뭣도 아니었으나 모든 행동은 강렬하고 빨랐으며 정확했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정확히 약점을 파고 들어가는 모.. 2024. 10. 16.
아무렇게나 골라낸. 기준도 없이 아무렇게나 솎아내 버린 것. 버려진 것들의 무덤. 쓸모없는 자들의 지옥. 볼란트는 이 땅을 무가치의 정원이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태어난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불로를 타고난 자는 불사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이 푸르고 하얗기만 한 땅에서는 풀조차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백야와 극야가 오가는 흑색의 광야였고, 혹독하게도 시린 곳이었다. 이 땅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버리고 떠나는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모든 버려진 것들이 모이는 땅에서 태어나 그곳을 버리고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애초에 그 기원이 비난이고 고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렇다면 탄생 자체가 슬픔이로구나. 버려진 자, 쓸모없는 자의 무덤이 되어버린 이 허연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면... 이 슬픔을 다.. 2024. 10. 14.
懇願. 왜 생에는 불행이 가득할까. 그것은 지우지 못할 절망과 알 수 없는 질문이 되어 내내 심장 한편을 파고들었다. 가장 큰 행운과 가장 큰 불행은 언제나 겹쳐져 있어, 한쪽에 손을 뻗으면 다른 한쪽도 따라오는 것이 당연지사. 어째서? 의문이 길을 잃고 사라진다. 어린 날의 포르투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뻗고, 잡고, 슬프게도... 무릎에 까진 상처가 생겼다. 넘어지며 생긴 상처겠거니 했다. 손으로 상처를 벅벅 문지른다. 괜스런 설움에, 혹은 아파서. 입술을 꾹 깨문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뻗는다. 괜찮아? 꾹 눌러쓴 후드 사이로 보인 별빛 같은 머리카락이, 지나치게도 눈길을 사로잡아서... 말을 건넨 이는 포르투나의 손을 잡고 미약한 치유마법과 보호마법을 함께 걸어준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 2024. 10. 12.
하염없이 떠도는. 그가 고향을 떠난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궁금했다. 그래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더 많은 곳을 둘러보며 경험하고 싶었다. 어떤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알던 누군가처럼 무언가를 지키고 싶기도 했다. 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힘이 생기고, 힘이 많아지면 지킬 수 있다. 그는 그런 생각을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키워갔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다고 여겼다. 다름은 차별을 불러온다.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이방인이었으니 어디를 가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아버지, 저... 떠나려고요. 이미 준비도 다 했어요." "그렇구나. 어디를 가든 조심하렴." "저, 떠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 2024. 10. 10.
告白. 하늘이 어두웠다. 이곳에서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별일이네, 싶었다. 언젠가 이런 하늘을 보았던 것 같은데...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매캐한 것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이 비에 전부 씻겨 내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피엔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돌린다. 익숙한 기척. 소피엔은 익숙한 텍스트 창을 띄워 평이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만이 길게 감돌았다. 그것은 이제껏 마주한 위화감의 정체와 같기도 했고, 혹은 길게 외면하고 만 마음의 한 자락 같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 얼마나 있든 소피엔은 그런 마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실래요? 목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으나 그는 그런 모양을 곧잘 알아보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 2024. 10. 8.
다정으로 살아가는. 차가운 땅의 바람은 여전히 혹독했다. 숨 한 번을 내쉴 때마다 생이 한 움큼씩 사라져만 가는 착각이 번져 나간다. 한때는 웃음소리가 번졌을 땅, 또 언젠가는 비명소리만이 만연했을 이 땅 위에는 소름 끼치는 고요함만이 머물렀다. 끔찍하게도.눈앞에 보이는 자는 한때 사랑했던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정 반대의 위치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마저 묻혀 사라질 허연 눈밭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띤 자였다. 이렇게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라고 해야겠구나. 더 이상 그녀를 닮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는 소름 끼치기만 했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기나긴 전투의 마침표를 찍으려 했을 뿐.작은 입김이 흘러나.. 2024.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