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73 상처로 얼룩진 생이여. 지독한 삶이다. 그 단어가 정확히 어떤 것을 표현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지금껏 들어온 수많은 말은 이 삶이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했고,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눈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진다. 한쪽 눈을 파고든 마기, 저주가 한쪽 눈을 좀먹어간다. 이제는 피가 흐르지 않지만 무언가가 계속 흐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온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일까. 흐르고 있는데도 모르는 피일까.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손으로 닦아낸다. 그것의 색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눕는다.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며칠이 지나간다. 혹은 몇 주였나? 시간이 번잡스럽게 어지럽혀진다. 눈을 .. 2024. 9. 7. 復活?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것을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한 생명은 그대로 썩어 사라짐이 마땅하나, 이따금 그것을 하지 못하는 생명도 있다. 마물의 핵이 사람의 시체에 자리 잡는다면 새로운 마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 마물이되 마물이 아닌 것. 사람의 의지를 놓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그 사람이 살아난다면... 부디 아주 조금의 가능성을 가진 모습으로 살아나길, 그렇게 바랐다. 그러니 이것은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밝고 상냥했던 사람이 어째서 지금은 얼어붙은 육신으로 고대 마물의 힘을.. 2024. 9. 5. 거짓말. 그는 불안했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가, 그리 물어본다면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간직한 마음인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언젠가의 두려움 같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차갑고 서늘한 곳에서 피어오른 온기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일렁인다. 마음이라는 것이 일렁거리고 울렁거린다. 금색 시선의 끝자락에 녹음 가득한 시선이 맞물린다. 눈을 마주친 이는 밝게 웃었다. □□, 무슨 생각하고 있어? 친우의 목소리. 언젠가 떠나가버릴 것만 같은 자의 목소리였다. 마치 무언가를 길게, 아주 길게 준비한 것만 같은... "..." "오늘따라 반응이 이상하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어? 넌 언제나 걱정이 많았잖아... 2024. 9. 4. 가치있는 세상. 이 세상은 가치 있는 세상이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세상이었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세상이었으나 그럼에도 이 땅에서는 생명이 자라난다. 아스테르는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겼다. 눈이 멀듯한 흰 설원은 사실 죽은 자의 뼈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디찬 세상은 잔인했고, 혹독했다. 검게 그을린 듯한 탁한 빛깔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황혼의 가장 어두운 분홍빛을 빼와 박아 넣은 듯한 눈은 늘 생기가 없었다. 북부의 종교는 잘못되었다. 이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 아스테르는 언제나 그랬듯 침묵하기를 택했다.겨울은 눈물과 고요의 계절이다. 모든 소리가 눈에 파묻혀 사라진다. 의미 있는 것은 없었다. 생이란 부질없다.. 2024. 9. 4. 무덤의 세계. 이곳은 안식처이다. 안식이란 곧 죽음을 뜻했고, 이윽고 숨을 쉬지 않게 된 생명은 탁류를 타고 흘러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그곳을 사후세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곳을 죽은 자들의 화원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누군가는 무덤의 세계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많은 세계였다. 관을 이고 걷는 괴수와 닮은 것. 더 이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것들이 잿빛의 세계를 영원히 배회한다. 생명의 종말이 바람처럼 휘날린다. 한때 살아있던 피부, 이제는 썩어 문드러지는 살갗에 닿는 감각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다만 그리 아프지는 않았으니, 아, 정말 죽음이 가까워지는구나. 그리 생각한다.제 이름조차 버리고 영웅이라고 칭해진 자는 죽은 자들의 화원 속에서 시들어간다. 한평생을 누군가를 위해 .. 2024. 9. 3. 고요한 숲의... 숲의 초목에서 비롯된 생명은 호기심도, 겁도 많았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그의 본질이었으나 그것을 하지 못했다. 주어진 시간이 길었던 이는 누군가가 자꾸만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죽음이란 본디 익숙한 개념이었으나 생명이라는 야트막한 것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하물며 주어진 시간이 이토록 차이 나는 것이... 멜리아레켄스, 메르라고 불리던 이는 오로지 홀로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었다. 모두 그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죽음이란 모든 생명에게 찾아오는 일이었는데, 필연이었는데, 멜리아레켄스는 타인의 죽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혼자였다. 하지만 혼자는 너무 외로웠다. 이따금 절박함을 느끼기도 했다. 죽지 마, 죽지 말라고. 여린 물빛 머금은 이는 죽음의 정.. 2024. 9. 2. 빛 들지 않는 지하. 세상의 가장 깊은 곳을 돌아다니는 탐험가는 햇살이 없는 것이 익숙했다. 오로지 등불 하나만 들고 지하를 탐험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었으나 높은 위험에는 높은 보상이 따랐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랄까. 탐험가는 가지고 있던 캔 하나를 따서 식사를 즐겼다.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 가니 슬슬 돌아가야만 했다. 세상으로 돌아가면 또 여러 이야기가 따라붙겠지. 이번에도 돌아왔다느니 하면서. 세상은 늘 가십거리를 원했기에 탐험가는 그것에 질려 오로지 가장 깊은 곳만을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누리는 평화는 외롭기도 했지만 평화롭기도 했다. 평화와 외로움은 비슷한 것이라. 온종일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큼은 지독하게도 피곤했다. 애써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 2024. 9. 1. 세상을 나누는 것. 처음, 이 세상의 시작에는 구분이 없었다. 하늘과 땅, 세상의 위와 아래, 천상과 지하는 나뉘어있지 않았다. 나뉘어있다 해도 그것의 사이에는 큰 장벽이 없었다. 머지않아 장벽이 없는 세상에서 괴이와 마수가 넘쳐나 세상을 뒤덮어가는 순간이 왔고, 그들은 대책이 필요했다. 멀지 않은 날, 신의 사자가 인간들의 앞에 섰다. 이 땅을 지키고자 한다면 무기를 들고 깊은 곳으로 괴이를 밀어 넣으세요. 그렇게 세상에서 악한 것이 전부 밀려난다면 깊은 곳을 온전히 봉인하고 지킬 것입니다.모든 것은 인간과 신의 뜻대로. 신의 사자는 태양빛으로 끝단을 물들인 것만 같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사라졌다. 신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었고, 악한 것에 대항했다. 때로는 무기의 끝이 같은 인간을 향할 때도 있었으나.. 2024. 8. 31. 일회성 만남 ^_^ 하늘은 지독하게도 파랗고, 그 사이에서 나부끼는 바람은 마치 갈 곳 잃어 떠도는 방랑자와 같았다. 꾹 눌러쓴 후드 사이로 흘러나온 보랏빛 밤의 장막이 걸쳐진 군청색의 머리카락은 길게 흔들거렸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내든 쿼터스태프로 마물 하나를 길게 갈라내고는 시선을 옮긴다. 완연한 보랏빛의 눈이 파란 햇살에 흐릿하게 반짝거린다. 그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다가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는 위험한데, 왜 또 나와있어? 보고 싶어서, 라는 장난 섞인 대답이 돌아온다면 손을 꾹 잡고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고 흰 두 눈이 선명한 보랏빛의 눈보다도 더 밝게 반짝였다. 걱정돼서 온 거냐는 물음에 당연하다며 긍정했다.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지. 조금은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사람이었으나 그냥 내버려두면 .. 2024. 8. 30. 안개 가득한 곳은. 지금 이 상황을 간단히 세 마디로 표현하자면, '망했다'에 가까웠다. 그것을 그나마 풀어서 말하면 '남의 충고를 제대로 새기지 않고 걸음을 들여 큰일이 났다'이고. 숲에 안개가 자욱해질 때는 걸음을 들이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으나 심각하게 여긴 것 또한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W는 한숨을 흘린다. 눈이 있었다면 질끈 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부야 워낙 비밀이 많고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았으나 안개가 자욱한 숲만큼은 정말 익숙해질 일이 없었다. 아무리 동부를 오래 오간 사람이라고 해도 길을 잃기 십상인데 무슨 생각으로 발을 들인 건지. 무엇을 어찌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분명 마을의 어르신이라면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을 쉬이 허락하실 분이 아니셨으.. 2024. 8. 28. 이전 1 ··· 3 4 5 6 7 8 9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