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373 도망친 곳에 있던 것.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감각이 뚜렷하다. 토할 것만 같다. 얼마나 뛴 건지 모르겠다. 다만 뒤에서는 계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함소리. 비명소리. 장작 타는 소리. 프리지아는 아픈 숨을 내뱉는다.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져 보석이 되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억세게 붙들고 있던 짧은 날붙이에서 새빨간 빛이 일렁거린다. 프리지아는 뛰던 것을 멈춘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아이가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줄 알았으나, 정확히 그 반대였다. 프리지아는 날붙이를 위로 치켜든다. 모든 것을 태울 듯 강렬한 불기둥이 솟아올라 추격해오는 사람들을 휘말리게 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주입당했던 것은 프리지아의 안에서 새로운 힘을 끌어내었다. 먹은 것도 없건만 속이 울렁거렸다. 불기둥이 천천히 사라.. 2024. 9. 22. 시들어버린. 그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다. 옛적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서 눈앞에 서 있는 꼴이 심히 메스껍다. 무엇이, 어떻게 메스꺼운 줄도 모르고. 사실은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슬픔의 한 종류였나?꽃의 이름을 가진 자는 그에게 늘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움이나 슬픔과 같은 선을 그리며 끝없이 추락하는 이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다. 시커먼 하늘에 푸른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하염없는 공허함만을 불러오는 이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적절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후각이 없음을 다행이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고요의 화원을 만들어 그 속에서 스러진 자였다. 모든 감각이 울렁거릴 정도의 짙은 꽃향기로 가득했음이 분명하다. 절망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죽어버리.. 2024. 9. 19. 그저 그런 거.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9. 18.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더라. 바뀌지 않는 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이 차가운 눈밭이 혹독하게 춥다는 것, 이 혹한의 추위에서도 빛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결국 짓눌려 죽어 차갑게 변해가던 것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현재이며 사실이다. 사실의 세계에서는, 그러니 이 차가운 눈 속에서는 꽃이 피어나지 않는다. 아주 연약한 희망으로 연명해 가던 것이 부질없었고 속절없었으며 비참했다. 그럼에도 희망은 굳세고 좋은 사람들은 강인해서. 바뀌지 않는 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애정 따위에 목이 멘다는 것, 기어이 사랑으로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삶이... 입에서는 기침이 터져 나온다. 속이 쓰리다. 상처가 길게 늘어진다. 그가 걸어온 길처럼 길게도 늘어졌다. 그 흔적이, 상.. 2024. 9. 16. 나부끼는 달의 영혼과... 순백의 달빛을 베틀에 직조하여 짜낸 것만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검은 장막 드리운 하늘 아래서 흔들거린다. 그림자 속에 녹아든 자는 유난히 달빛이 밝은 날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이 마구 흔들리고 나부끼 것과 같은 모습이다. 희고 쾌청한 빛깔의 눈은 고고하게 빛난다. 어떠한 부정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손에 들고 있는 한쌍의 검이 밤하늘 아래서 부드럽게 움직인다. 마치 검무를 이어가듯이. 결코 길지 않은 머리칼이 흩날려 얼굴을 전부 가린다. 검무를 춘다는 것은 단순한 핑계였으니, 달빛이 구름에 가려질 때 비로소 온전히 사라진다. 그 누구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가 품은 이름처럼 한없이 자유롭게 흔들리고 나부끼는 달의 영혼이었으니까.자유롭고 강인한 자가 당도한 곳은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고, 그 공간.. 2024. 9. 16. 여명에 저무는 꽃. 몸 위에 아름답고 부드러운 꽃이 무성하게 피어난다. 시력은 진즉에 다 잃어버리고 말아 꽃의 고운 빛깔을 눈에 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하지만 감각이라고 할만한 것이 남아있었다면 끔찍한 고통이 동반되었을 것이니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은 야트막한 다행이 되었다. 죽어가면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기쁨인지 절망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밤에 피어나 여명에 저무는 꽃의 이름을 가진 자는 몸을 평온하게 뉘었다. 고통도, 슬픔도, 후회나 미련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언제나 필사적으로 기쁨을 찾았고, 웃으면서 지냈다. 비탄보다 행복감이 더 많은 세상이었으니 분명 괜찮은 삶이었다. 그럼에도 일찍 숨이 다하고 마는 것은 슬픔이나 비탄에 가까웠으니... .. 2024. 9. 15. 달이 밝은 날. 그는 은색 보석을 닮은 빛깔의 긴 머리칼을 조심히 넘긴다. 들이킨 숨에서 시원스러운 밤의 향기가 느껴진다. 얼굴에 피어난 몇 송이의 꽃이 하느작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머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짙은 꽃내음에 정신이 흩어질 것만 같은 감각이 밀려든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어딘가 아파 보였고, 그런 창백한 얼굴을 반투명한 흰 천으로 가린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얼굴이 달빛에 빛난다. 그의 이름인 월하미인처럼 밤에 곱게 빛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듯 이끌었다. 마치 달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신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다만 그는 혼자인 것이 익숙했고,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은 보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혹하게 만들 일조차 없었으니... 그것이 비극인가, 한 .. 2024. 9. 14. 깨진 유리병과 편지. 고운 갈색의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바람에 모두 흐드러진다. 선명한 푸름 깃든 어여쁜 눈이 저기 먼 곳을 바라본다. 마치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혹은, 무언가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하늘색 리본 머리핀을 뺀다. 리본 끈을 다 풀고는 바닥에 툭 놓는다. 혼자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을 그토록 많이 들었으나 모닐레는 이따금, 혼자 있고 싶다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하지 못한 사과를 해야 할 것만 같다고 느낀 까닭이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간절하게 보고 싶지는 않아." 어느 순간부터 뒤편에 서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건다. 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모닐레에게 다가온다. 복수를 하러 왔냐는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2024. 9. 12. 별의 아이. 세상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사실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세상에 펴지는 역병, 더 이상 신도, 천사도, 악마도 아니게 된 괴물들이 세상을 시시각각 집어삼키려 했다. 다만 더 이상 신을 따르지 않게 된 타천사들은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역병에 대항했고, 일부 사람들은 타천사와 같은 선에 섰다. 다른 이들은 그들을 수호하는 자들이라 칭했다. 이 세상의 수호자들은 필사적으로 세상을 지켰고, 그 필사적인 마음은 또 다른 빛이 되었다. 빛은 모든 사람들에게 깃들었다. 가끔, 아주 희박한 확률로 특별한 존재가 태어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별의 아이였다.별의 아이들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잠을 자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필요 없었다. 이들은.. 2024. 9. 12. 절제의 선율. 그 절대적인 선율은 거대한 황금 날개를 가지고 있다. 햇빛이나 달빛 따위를 받을 때마다 반짝이는 연하고 부드러 꽃잎처럼, 혹은 청아한 소리 울려 퍼지는 쪽빛 하늘처럼 부드럽게 빛난다. 절제의 미덕을 가진 신은 나비의 날개를, 혹은 천사의 날개를 닮은 것을 움직인다. 폭풍처럼 일렁이던 것이었으나 다정하고도 찬란한 신이 품고 있는 의지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땅에 닿았다. 사람은 무르고 연약해 신을 그대로 마주하면 미치고 만다. 그러니 최대한 부드럽게, 절제하며 사람들을 바라본다. 깊고 깊은 애정을 충분히 무르게 해서 사람들에게 흩뿌리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절제하는 것이다. 넘치는 마음은 고통을 불러온다. 절제가 미덕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는 것, 무언가를 감내하는 것은 황금색 나비.. 2024. 9. 8. 이전 1 2 3 4 5 6 7 8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