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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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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만남. 중앙지역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특별한 수업을 한다. 서로 학년이 다른 두 학생이 무언가를 함께 배우거나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멘토-멘티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었다.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불러왔기 때문에 꾸준히 시행되는 일이었다. 플론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당연히 멘토-멘티가 있었고, 플론은 어느 부분에서나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는 것에 더해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도 잘 해냈다. 플론은 늘 멘토의 역할로 다른 학생과 페어를 맺었다. "안녕하세요, 플론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루비...라고 해요." 이름 그대로 붉은 보석 같은 머리칼과 반짝이는 사과의 농익은 색을 담아낸 눈이 인상적이었다. 자신감은 조금 없어 보였지만, 그런 것은.. 2024. 8. 28.
다정하고 매정한, 그리고 찬란한. 헬렌 리시안셔스는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린다. 친구가 먼저 말을 걸어온 그 순간. 어린 날의 헬렌은 너무나도 불안정했다.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혼자였다. 그때 느꼈던 슬픔은 말로 다할 수도 없었다. 너무 외롭고 슬펐다. 시간이 지나며 그러한 외로움은 사라져 갔지만, 어느 순간에는 문득 그런 외로움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의 흔적은 잊으려 하면 떠올라 자꾸만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헬렌의 시선 끝에 머무른 아이는 너무 작았다. 그렇게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저보다도 더. 아무런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고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무서워하지 않도록. 아이는 그런 헬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온다. "... 저기." "네, 블리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저, 안.. 2024. 8. 27.
칠흑빛 술사. 어둠 짙푸른 밤에는 별의 빛무리가 휘날린다. 마치 칼날과 같이, 고요하게 찾아오는 선율과 같이. 한밤의 달빛을 등지고 있던 이는 천천히 걷다가, 이내 빠르게 뛰었다. 바닥에서 부풀어 오르는 붉은 기운을 보다가 제 몸집보다 큰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어 그대로 높이 뛰어오른다. 마치 장대를 쓰듯이. 공중에서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떠오른 몸은 높은 바위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마치 가벼운 날갯짓 같은 행동에 새카만 망토가 새의 날개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서슬 퍼렇게 빛나는 보랏빛 눈은 붉은 이채를 머금는다. 바닥을 기는 붉은 것은 마물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길게 뛰어오며 바닥에 새긴 선명한 군청색과 보라색의 주술진이 연달아 붉은 기운을 억눌렀다. 기어이 틈을 비집고 기어 나오는 마물은 술사의 쿼터.. 2024. 8. 26.
오로지 상처뿐인 곳에서. 트리거 워닝: 전투노예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가혹행위, 상해, 살해 이 글은 전부 가상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기 명시된 소재는 현실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며, 일어난다고 하면 비극적인 일입니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위와 같은 일을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첫 기억의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작은 아이가 세상을 인식할 때부터, 그러니 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본 곳은 좁은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 위생적이지 않은, 오염이라도 된 것만 같은 식수와 딱딱한 빵이나 차가운 스프가 식사가 제공되는 곳. 그것이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고, 어떤 시간이 되면 무거운 문이 열린다. 눈앞.. 2024. 8. 25.
도깨비의 하루. 그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이 자주 쓰고 손을 오가던 물건에 혼이 깃들어 도깨비가 된 존재였기에, 그는 태생부터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는 늘 인적 드문 길을 오가며 사람들을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었고, 사람들은 그런 도깨비를 좋아했다. 잘 익은 벼이삭 빛깔의 긴 머리카락은 순풍에 흔들리고, 이따금 황금의 이채를 머금고 반짝거리는 연한 빛의 눈은 늘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느른한 미소는 언제나 여유가 가득했고, 그런 여유는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불러왔다. "으앗! 무슨-" "어이쿠, 미안! 위험한 게 있어서 말이야." 사람 하나를 달랑 들고 있다가 조심히 내려놓는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 스산하게 기어가다 도깨비가 피운 황금빛 불꽃에 휩싸여 사라진다. 조심해, 여긴 위험한 .. 2024. 8. 24.
초혼 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모든 물질적인 것은 의식의 세계에 존재하며, 모든 비물질적인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 존재한다. 두 세계는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의식은 무의식으로부터, 무의식은 의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존재하기에 성립되고, 성립되기에 인식된다. 다만 사람의 뇌는 받아들이는 데에 명확한 한계가 있어 어느 세상도 완벽하게 알아챌 수 없다. 그렇게 알아챌 수 없는 것은 꿈이 된다. 아주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그리고 어느덧 눈치챈다면 그 꿈의 세계는 지척에 와 있다. 사람들은 꿈의 세계에 저도 모르게 들어오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꿈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며 금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곤 하지만, 간혹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하지 않고, 기억되지 못한 자들이.. 2024. 8. 23.
청소합시다!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큰 한숨부터 쉰다. 단발을 약간 넘는 청록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양동이와 대걸레를 든다. 그러고 보니 지사에 사람 하나가 온다고 했는데. 잠시 시선을 굴리다가 발자국 소리에 뒤돌아본다. "아, 안녕하세요! A-6 지사에서 발령 나서 오게 됐습니다." "안녕! 후배님이라고 불러도 돼? 내가 엔간해선 이름을 잘 안 불러서 말이지."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사람 좋은 미소를 본 이는 잠시 의문을 가진다.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게 편하지 않나?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니까. 그렇다면 저는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어, 상관없어! 야, 너, 같은 거나 멸칭만 아니라면. "그건 그렇고, 기계 사용 방법은 알아? "아, 대부분 배우고 왔어요! 조금 미숙할 수는 있지만 열.. 2024. 8. 21.
최후의 사진작가. 이 세상은 무너졌다. 국가 간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법률은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 수많은 인종이 사라졌다. 차별하던 사람, 차별당하던 사람, 절망하던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까지.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 이 세상은 천천히 인류의 멸망을 향해 움직인다. 다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평화를 불러왔다. 인종의 구분이 없으니 깊게 새겨진 차별이 사라졌고, 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혐오도 없으며, 법률이 없으니 범죄도 없다. 세상의 끝자락에 남은 마지막 인류는 고요한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고요한 종말은 이윽고 평화를 뜻했다. 그 끝자락에 있는 사람 중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지금까지 작동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주기적으로 관리했기에 큰 문제없이 잘 .. 2024. 8. 20.
넘어지고 마는. 이 세상은 이미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평화도, 관념도, 균형도 이미 잔뜩 기울어진 채였다. 기울어진 세상 위에서 발을 딛노라면 넘어져서 다치고 만다. 칼렌은 그런 세상이 싫었다. 왜 모든 사람들은 기울어진 평화를 원하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고. 칼렌이 혼자서 몸을 웅크리고 표정을 찌푸리고 있노라면 그의 형제가 와서 손을 내밀어준다. 칼렌, 표정이 안 좋아. 괜찮아? 어린 칼렌은 그것이 다정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괜찮아, 누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 말에는 또 나직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칼렌의 형제, 그러니까 누나인 플론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좋은 학생,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좋은 가.. 2024. 8. 19.
덧없는 것. 모든 것은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없다. 티끌 같은 희망을 아무리 손에 그러쥔다 해도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찰나의 안온에 매달리지 말고, 증오로 살아가지 말고, 어리석음에 눈멀지 말고, 그럼에도 내던지지 말고... 덧없는 것들에 의미를 새기는 것은 미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련함으로 빚어진 자는 빚어진 대로 살 수밖에 없었다. 아카는 우연히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뎠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칠흑색의 긴 머리칼은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고, 탁한 잿빛의 눈은 애매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도자기로 빚어놓은 듯한 발이 바닥에 닿는다. 눈이 밟히며 뽀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이킨 숨에서 비탄이 느껴졌다. 세상의 지식으로 살아가는 이는 공기 중에 떠도는 모든 지식을 읽었다. 이 세상의 지식에서는.. 2024.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