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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 환희의 인간

자캐 로그208

물빛 초목. 푸른 호수가 존재하는 푸른 숲에서는 맑은 빛의 초목이 자란다. 그런 초목은 부드러운 빛을 머금고 마음껏 반짝인다. 초목에서 태어난 정령은 늘 밝은 빛을 머금고 곱게 빛난다. 맑은 하늘이 투명하게 비치는 에메랄드빛 호수의 색을 그대로 담은 머리카락에서는 상쾌한 물결의 향기가 났고, 수레국화의 빛을 가득 담아낸 깨끗한 눈에서는 파도 향기가 풍긴다. 깨끗하고 투명한 물을 머금고 자라난 초목의 정령은 자연을 사랑했다. 자연의 강대한 힘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여린 들풀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는 사람을 무서워했다. 사람은 자연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정령인 그에게 손을 뻗은 적도 있었다. "메르, 괜찮아?!" 초목의 정령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정령에게까지 손을 뻗는.. 2024. 8. 13.
넘어질 것만 같은.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미 잔뜩 기울어져 있어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 말이다. 사실 이 세상은 그 어떠한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 불공평만이 유일한 공평함으로 작용한다. 누군가는 행운이라고 생각한 삶이 사실 감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허무감은 말로 다할 수도 없을 것이다. 플론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가끔은 사는 것에 숨이 막혔다. 좋은 학생, 좋은 자식, 좋은 친구.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남는 것은 쉬웠지만 스텔라 플론, 그 자신으로 남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어둑한 방 안에서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누군가는 플론에게 행운아라고 했다. 힘듦 하나 겪지 않고 평온한 삶을 살게 됐다고. 누군가는 플론에.. 2024. 8. 13.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망각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히고, 지워지고, 또는 추억의 형태로 덧씌워지곤 한다.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삶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 어떠한 것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설령 아무리 끔찍한 악몽이라고 할지라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망각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한다. 아무리 속을 찢어발겨놔도 잊을 수 없다. 소피엔은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완전기억능력은 아주 편리하면서도 굉장히 불편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잔인한 것조차 잊을 수 없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그러지 않았던 것은 분명 텅 빈 것에 대한 공포심 때문일지도 .. 2024. 8. 12.
이야기는 다정함을 머금고. 윤슬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쉰다. 이제 기껏해야 16살인 윤슬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그 나잇대의 학생들이 하는 고민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학교는 일찍이 자퇴했으나 모두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해 학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지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있고, 조금 더 친밀한 관계를 쌓은 사람도 있었다. 일찍부터 프로그램을 만지는 것이나 무언가를 써내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소질도 있는 편이어서 이른 나이부터 게임 개발과 디자인 쪽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니 누군가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돈을 벌어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늘 게임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이야기를.. 2024. 8. 9.
자유를 위하여. 꽃이 피어나 화사한 계절이 돌아온다. 온갖 꽃들이 정신 사납게 피어난 날에는 꼭 그 향기에 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설화는 제 앞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을 본다. 온갖 독이 역겨운 향을 풍기며 뒤섞인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투명한 초목빛의 눈이 무감정하게 그것을 바라본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알았다. 이 집안사람들은 서로를 증오하기에 급급했으니까. 마치 살아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증오라도 되는 것처럼. "이 독, 네 것이 맞느냐?" 설화는 그 말을 듣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 독은 설화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사람을 죽이고 난 이후에 그 죄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죽은 자는 독살당한.. 2024. 8. 8.
슬픔은 바람과 함께. 안갯속의 숲은 늘 고요했다. 어떠한 것도 없이 정체된 곳. 안개는 외부로부터 내부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본질은 달랐다. 안개를 만들어낸 자는 안갯속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이 소중했고, 모두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뿐이었다.휘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닌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진다. 그것은 긴 시간동안 함께한 절망감이었고, 혹은 누군가의 죄악마저 짊어지고자 하는 이타심이었다. 광명이 가득한 세상은 부도덕함이 가득했으며, 암흑이 가득한 땅에는 슬픔이 넘실거린다. 누군가의 비탄이나 절망감처럼. 문득, 물기 섞인 바람이 뺨을 두드린다. 휘는 그 불온한 것을 알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진다. 체력이 닳을 일이 없었으나 숨이 빠르게 차는 기분이었다. 몸속에 무언가가 들이차는 느낌. 감정이 일렁거린다. 숲의 안개가 짙.. 2024. 8. 8.
찬란한 비애. 파도가 넘실거린다. 하얀 파도꽃이 산산이 조각나 사라진다. 그것은 한때의 슬픔 같기도 했고 길게 이어진 절망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삶은 온통 비애였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리. "..." 아리아는 깊은 바이올렛이 만연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본다. 검붉은 것이 바닥에 퍼져있고, 가냘프게 숨 쉬던 사람 몇은 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난도질되어 죽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한 사람만이 서있었다. 본래의 태양빛을 가리듯 검게 칠한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어 내린 사람은 올곧게 아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시선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걸음을 옮겨 꿋꿋하게 서있는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다. 아리아 님. 그 목소리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 2024. 8. 5.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은설화는 어떤 명망 있는 집안의 여식이었다. 누구보다도 똑똑한 아이였고 재능도 많이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을 제때 꽃 피우는 일은 없었다. 은설화에게 집은 너무나도 냉정한 곳이었다. 형제들의 시기를 받는 일은 흔했고, 어린 나이에 독을 먹는 경우도 흔했다.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훈련이라곤 했으나 설화는 이 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 독을 보낸 것이 어느 형제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설화는 결코 자신의 앞에 닥친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피할 수도 없었거니와 할 수 있는 것이 피하지 않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사실 그것도 떠밀려 한 선택일 뿐이었으니 할 수 있는 것도, 해낸 것도 없었다. 무엇이 섞여있는지 알 수 없는 잔을 하염없이 들여.. 2024. 8. 5.
돌아오는 대답은 잔인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꽃. 설화라는 이름의 뜻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때의 아름다움처럼 덧없는 것, 쉬이 녹아내리고 마는 것, 차갑기 그지없는 세상 속에서 피어나 사라져 버리는 것. 설화는 제 이름뿐만 아니라 이 세상 자체도 그리 덧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굳게 믿었던 것이나 믿음 없는 것, 부족함이나 풍족함,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세상은 분명 잔혹하였다. 언젠가부터 설화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열하길 반복했다. 그것은 주변의 시선도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자기혐오에 가까웠다. 나약해서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고, 심지어는 스스로 인식한 자신마저 온전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설화는 흐릿한 숨을 내쉰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그 질문이 입안을 .. 2024. 8. 3.
이해도 용서도 하지 마. 라일락은 가족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애틋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 붙잡아놓을 명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집은 너무나도 답답했고, 안정감이라곤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지옥이다.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리고 어디가 지옥이란 말인가?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던져두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마음속에 하염없이 담아둔 말들이 녹슨 칼날이 되어 속을 사정없이 찢어발기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는데,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 말 하나를 꺼내두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래서 이 집안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기회는 멀지 않을 때 찾아왔다. 열다섯 남짓 되는 라일락의 재능을 알아본 한 사람이 후원인으로 나선 것이다. 라일락은 그것이.. 2024. 8. 3.